💈 챕터 1. 10년 단골 디자이너와의 이별, 그리고 낯선 바버샵의 세계
한국에서 무려 10년 넘게 한 미용실만 다녔다.
내 담당 디자이너는 나보다 내 머리를 더 잘 아는 사람이었다.
숱이 어디가 많고 어디가 적은지, 가르마를 어느 쪽으로 넘겨야 얼굴이 갸름해 보이는지, 심지어 내가 말하기도 전에 오늘 좀 짧게 할까요 하고 먼저 물어볼 정도였다.
앉기만 하면 알아서 척척, 마치 나만을 위한 헤어 주치의가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2026년 3월 21일, 두 딸과 함께 필리핀 일로일로 땅을 밟는 순간 그 모든 편안함이 공항 활주로 위에서 증발해 버렸다.
여기 필리핀에서는 남자는 바버샵, 여자는 살롱으로 완전히 나뉘어져 있다.
한국처럼 미용실 하나에 남녀가 사이좋게 앉아서 머리를 자르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다.
평생을 미용실에서 여성 디자이너의 섬세한 손길로 커트를 받아온 나로서는 이게 보통 문화 충격이 아니었다.
50대 중반의 아빠가 새로운 나라에서 머리 하나 자르는 것조차 하나의 거대한 도전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아이들과 함께 경제적 자립을 꿈꾸며 시작한 일로일로 생활인데, 첫 번째 난관이 바버샵일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그래도 내 좌우명은 변함없다.
노력하지 말고 즐기자!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동네 바버샵 문을 밀었다.
😰 챕터 2. 무뚝뚝한 바버에게 내 소중한 헤어스타일을 맡기다
고백하자면 나는 남자치고 헤어스타일에 상당히 진심인 사람이다.
한국에서는 매달 미용실 가는 날을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로 체크해 놓았을 정도이고, 앞머리 길이가 1센티만 달라져도 거울 앞에서 한참을 들여다보는 그런 스타일이다.
옆머리 볼륨, 뒷머리 라인, 구레나룻 각도까지 하나하나 신경 쓰는 남자라 주변에서 연예인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따지냐는 소리를 수없이 들어왔다.
그런 내가 난생처음 보는 무뚝뚝한 필리핀 남자 바버에게 이 소중한 머리를 맡기려니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일단 핸드폰에 저장해 둔 원하는 스타일 사진을 보여줬다.
바버는 사진을 대략 3초쯤 쳐다보더니 고개를 한번 끄덕하고는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며 클리퍼를 집어 들었다.
야, 잠깐만, 그 3초 안에 뭘 파악한 거지 하는 불안감이 밀려왔지만 이미 위이이잉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거울을 슬쩍슬쩍 쳐다보는데 자꾸만 짧아지는 옆머리를 보며 속으로 아 이거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기대 반 걱정 반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걱정이 아흔다섯에 기대는 다섯 정도였다.
다 끝나고 바버가 짜잔 하는 표정으로 거울을 들이미는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하지만 아주 깊게 비명을 질렀다.
😅 챕터 3. 결과는 멘붕, 그래도 250페소 약 6,000원의 가치를 찾아보자
거울 속 내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10년 넘게 정성껏 길들여 온 나만의 스타일은 온데간데없고, 거울 속에는 어딘가 어색한 아저씨 하나가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볼륨은 사라졌고 옆머리는 너무 짧고 전체적인 밸런스가 내가 원한 것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속으로는 울고 싶었지만 바버 앞에서 한국 아저씨의 체면이라는 것이 있기에 괜찮아요 땡큐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동네 로컬 바버샵 기준으로 250페소를 냈는데,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약 6,000원이다.
일로일로 동네 바버샵 평균 가격이 100페소에서 150페소, 그러니까 한국 돈 2,400원에서 3,600원 정도라고 들었으니 거의 두 배 가까이 낸 셈이다.
비싸게 줬으면 좀 잘해주지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건 뭐 문화 차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단 수업료라 생각하고 앞으로 20일 정도만 버티면서 머리가 자라길 기다려 보련다.
다음에는 SM시티나 페스티발몰 같은 대형 핑몰 안에 있는 바버샵을 탐방해 볼 생각이다.
가격이 좀 더 나가더라도 실력 있고 소통이 되는 바버를 찾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 훨씬 이롭겠다는 결론에 단호하게 도달했다.
🌟 챕터 4. 딸들은 살롱 면제, 아빠의 바버샵 탐험은 계속된다
다행히도 중1 큰딸과 초6 작은딸 두 딸님은 머리를 길게 기르겠다고 쌍둥이처럼 동시에 선언했다.
덕분에 살롱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추가 고생은 당분간 면제라서 아빠로서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딸 둘까지 머리 문제로 아빠 어떡해를 외치면 이 50대 아빠의 멘탈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지금 어학원에서 매일 영어 공부에 열심이고, 한국에서 학원 뺑뺑이를 돌리며 흥미를 잃었던 공부에도 여기서는 조금씩 재미를 붙여가고 있다.
새로운 환경이 주는 자극이 아이들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이 아빠의 눈에도 확실히 보인다.
50대 중반에 필리핀이라는 새로운 나라에서 딸 둘과 함께 부딪히고 깨지고 웃으며 살아가는 이 일상은 매 순간이 콘텐츠이고 매 순간이 도전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다.
바버샵 탐험도 하나의 시리즈 콘텐츠로 만들어서 일로일로 최고의 바버샵을 찾는 그날까지 기록할 생각이다.
도대체 몇 군데를 더 돌아다녀야 내 맘에 쏙 드는 곳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과정 자체를 즐기련다. 이것이 바로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슈퍼울트라캡숑절대초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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