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망고트리 호화만찬, 형님의 통 큰 신고식

필리핀 일로일로에 온 지 벌써 두 달 가까이 되어간다.
매일 중1, 초6 딸 둘과 영어공부하랴 부업거리 찾으랴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는 중인데 어제는 조금 특별한 저녁이 있었다.
어학원에 오신 지 5일쯤 된 65년생 형님이 신고식을 하신다며 저녁을 쏘신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왔을 때 그런 거 없었는데 이 형님은 확실히 스케일이 남다르시다.
공무원으로 정년까지 묵묵히 일하시다가 퇴직 후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찾아 이 먼 필리핀 땅까지 오신 분인데 공부에 대한 열정이 이십대 청년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나도 쉰 중반이라는 어쩌면 늦은 나이에 아이들 데리고 여기까지 날아왔지만 이 형님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나이란 건 정말로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나와 띠동갑인 한 달쯤 된 젊은? 친구까지 합류해서 어른 남자 넷이서 망고트리라는 식당으로 향했다.
형님이 아이들도 같이 가자고 권하셨지만 어른 넷이 둘러앉은 자리에 중학생 초등학생이 끼어 앉으면 서로 불편할 것 같아서 정중히 사양했다.
대신 아이들에게는 내일 삼겹살을 사주겠다고 약속했더니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아빠 다녀오라고 쿨하게 보내준다.
역시 우리 딸들은 삼겹살 앞에서는 아빠의 저녁 외출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현실적인 아이들이다.
🌳 챕터 2. 초록망고 스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열대의 복불복
망고트리라는 이름 그대로 식당 정원 한가운데에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망고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실내보다 실외 공간이 두세 배는 넓게 구성되어 있어서 동남아 특유의 탁 트인 개방감이 제대로 느껴졌다.
직원들 서비스도 거의 호텔 수준이어서 음식 나오는 타이밍이나 응대 하나하나가 깔끔하고 정성스러웠다.
그런데 이 멋진 풍경 속에 예상치 못한 스릴 요소가 숨어 있었다.
그 거대한 망고나무에서 아직 초록색인 덜 익은 망고가 가끔 뚝 하고 떨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식사하는 동안 바로 옆 테이블 근처로 퐁 하고 하나가 낙하했는데 크기가 제법 묵직해서 재수 없으면 머리를 직격으로 맞을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필리핀에서 망고에 맞으면 이것도 추억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긴장감 넘치는 야외 식사였다.
사실 원래는 실내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마침 생일파티 단체가 실내 전체를 예약하는 바람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밖으로 밀려났다.
처음에는 열대의 더위가 몸을 감싸서 이거 밖에서 먹을 수 있나 싶었지만 직원이 대형 선풍기를 바로 틀어주니 놀라울 만큼 금세 시원해졌다.
성인 네 명이 충분히 먹고 계산서를 받아보니 4천 페소 한화로 약 10만 원 정도가 나왔다.
일로일로 현지 물가를 생각하면 꽤 비싼 식사였지만 서비스와 분위기 그리고 머리 위 망고 복불복 스릴까지 생각하면 가끔은 이런 호화로운 사치도 나쁘지 않다.
🎂 챕터 3. 생일파티 부러움, 생일 당사자가 쏘는 나라의 행복 비밀
우리가 초록망고 떨어지는 야외에서 식사하는 동안 실내에서는 30여 명이 모여 성대한 생일파티가 한창이었다.
웃음소리 노래 소리 박수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고 갓난아이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온 가족이 총출동한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필리핀은 생일파티에 진심인 나라라는 말을 들었는데 직접 보니 그 말이 백 퍼센트 사실이었다.
한국에서는 생일인 사람이 축하를 받고 선물을 받는 게 일반적인데 여기는 정반대다. 필리핀에서는 생일 당사자가 가족과 친구와 동료들에게 음식을 사주고 대접하는 문화가 있다.
또 한 해를 무사히 살아온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생일자에게 리브레 하고 외치면 그건 한턱 쏘라는 뜻이란다. 그래서 생일인 사람이 오히려 가장 바쁘고 가장 많이 지출하는 독특한 구조가 만들어진다.
부자들은 식당을 통째로 빌려 초호화 파티를 열고 넉넉지 않은 서민 가정에서도 어떻게든 정성을 다해 잔치를 차린다고 한다.
세계 행복지수 순위만 놓고 보면 필리핀이 56위로 최상위는 아니지만 실제로 이곳 사람들 표정을 보면 숫자로 설명되지 않는 행복감이 분명히 존재한다.
소득 수준이나 경제 지표와 상관없이 특별한 날을 온 힘을 다해 축하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모습이 그 증거다.
한국에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생일이 그냥 평범한 하루처럼 스쳐 지나가기도 하는데 이곳 사람들을 보면 축하할 일을 제대로 축하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절실히 깨닫게 된다. 이 문화가 솔직히 너무 부러웠다.
💪 챕터 4. 50대 도전의 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시작이다
형님과 저녁을 먹으며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환갑을 코앞에 둔 나이에 홀로 짐을 싸서 필리핀까지 와서 영어를 새로 배우겠다는 그 결심이 결코 보통 사람의 용기가 아니다.
수십 년간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인 울타리 안에서 살다가 정년 후에 익숙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하신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도 50대 중반에 중1 초6 연년생 딸 둘을 데리고 이곳 일로일로까지 왔다.
한국에서 학원을 여러 군데 돌리며 공부에 점점 흥미를 잃어가던 아이들에게 완전히 다른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고 동시에 나 자신의 경제적 자립이라는 현실적인 과제도 함께 안고 온 것이다.
솔직히 부담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내 좌우명은 언제나 변함없이 노력하지 말고 즐기자이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무거워지고 즐긴다고 마음을 바꾸면 초록망고에 맞을 뻔한 아찔한 순간도 배꼽 잡는 에피소드가 되고 비싼 외식비도 가끔은 필요한 인생의 양념이 된다.
형님의 뜨거운 열정을 보면서 그리고 필리핀 사람들의 진심 어린 생일파티 문화를 보면서 행복이란 조건이 채워져야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태도라는 걸 다시 한번 깊이 느꼈다.
내일은 딸들에게 약속한 삼겹살을 사러 가면서 크게 한번 외쳐볼 것이다.
슈퍼울트라캡숑절대초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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