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일로일로, 올해는 진짜 다르다
필리핀 일로일로에 온 지 벌써 두 달 가까이 되어간다.
처음 도착했을 때도 더웠지만, 5월에 접어들면서 더위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올라섰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공기가 무겁고, 어학원까지 걸어가는 짧은 거리에도 셔츠가 흠뻑 젖는다.
이건 단순한 여름 더위가 아니다. 올해 이상기온이라는 게 피부로 와닿는다. 현지인 친구들한테 물어봐도 대답은 한결같다.
"나도 여기서 태어나서 쭉 살았는데, 올해는 진짜 유난히 덥다"고 한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 땅을 떠나본 적 없는 사람들조차 혀를 내두르는 더위라면, 한국에서 건너온 우리 부녀에게는 거의 재난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1 큰딸은 밖에 나서면 "아빠 나 진짜 녹는다"를 입버릇처럼 되뇌고, 초6 작은딸은 말도 없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한숨을 푹푹 쉰다. 두 딸을 데리고 이 열대의 무더위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 50대 중반의 체력으로는 솔직히 만만치가 않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 원래 편한 길만 골라서 갈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오늘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씩씩하게 하루를 시작해본다.
🏬 2. 쇼핑몰,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
이 살인적인 더위를 피하는 방법을 궁리하다가 결국 찾아낸 최선의 답은 쇼핑몰이다.
일로일로에는 생각보다 대형 쇼핑몰이 꽤 많다.
SM시티 일로일로는 규모도 크고 매장도 다양해서 반나절은 거뜬히 보낼 수 있고, 로빈슨 백화점은 좀 더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이 있다.
메가타운이라는 곳도 있는데 나름대로 먹거리와 볼거리가 갖춰져 있어서 아이들이 좋아한다.
이 나라에서 쇼핑몰이 이렇게 발달한 이유를 이제야 뼈저리게 이해했다.
쇼핑몰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상업 공간이 아니라, 더위로부터 시민들의 삶을 지켜주는 일종의 공공 인프라에 가깝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실내로 한 발짝 들어서는 순간, 밖의 지옥 같은 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온몸의 세포가 하나씩 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주말이면 가족 단위로 쇼핑몰을 찾는 현지인들로 북적북적 넘쳐나는데, 다들 우리와 비슷한 심정이겠거니 싶어서 괜히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에 있을 때는 쇼핑몰을 그저 소비의 공간으로만 여겼는데, 여기서는 완전히 생존의 공간이다.
이 무더위 속에서 쇼핑몰은 우리 부녀 삼인조의 핵심 생존 전략이 되어주고 있다.
😎 3. 아이들은 천국, 아빠는 서성이는 유령
쇼핑몰 안에서의 진짜 문제는 기온의 온도차가 아니라 세대 간 온도차다. 중1 큰딸과 초6 작은딸은 쇼핑몰에 발을 들이는 순간 완전히 물 만난 물고기가 된다.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면서 이 매장 저 매장을 신나게 돌아다닌다.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둔 용돈 지갑을 꺼내들고 악세사리 코너를 샅샅이 뒤진다.
반짝이는 귀걸이, 알록달록한 팔찌, 도대체 어디에 쓰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작은 소품들을 한참 동안 진지하게 비교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하나씩 집어 든다.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는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메뉴판을 들여다보더니 결국 가장 저렴한 아이스크림 콘을 하나씩 골라 들고 행복한 얼굴로 핥기 시작한다.
용돈의 소중함을 아는 건지 본능적으로 가성비를 따지는 건지, 아무튼 기특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나는 사고 싶은 것이 진심으로 하나도 없고, 아이스크림도 나이가 드니 별로 당기질 않는다.
문제는 쉴 곳도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필리핀 대형 쇼핑몰에는 벤치라는 게 거의 없다. 군데군데 안마의자가 놓여 있긴 한데 시간당 150페소를 내고 누워야 한다.
그걸 돈 주고 앉자니 영 내키지가 않는다.
결국 나는 쇼핑몰 통로를 이리저리 서성이는 유령이 된다.
아이들이 천국을 누리는 동안 아빠는 갈 곳 없이 떠도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대차이라는 건가 싶어 절로 쓴웃음이 새어 나온다.
💪4. 그래도 우리는 오늘도 계속 간다
쇼핑몰 한쪽 구석에 서서 멍하니 있다 보면 가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50대 중반에 어린 두 딸을 데리고 낯선 나라에 와서 새 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한국에서 아이들은 공부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고, 학원을 여러 군데 다니느라 바쁘기만 하고 정작 눈빛은 점점 무뎌져 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일로일로 사립학교 입학을 결심하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지금은 어학원에서 매일 영어 공부를 함께 하면서 입학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는 중이다.
동시에 블로그도 쓰고 부업거리도 찾아보면서 경제적 자립의 기반을 하나씩 다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내가 직장과 내가 벌여놓은 사업들을 관리하며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주고 있고,
큰딸 언니는 중2 때 홀로 미국에 건너가 지금은 뉴욕의 이름 있는 대학에 합격하고 장학금까지 넉넉히 확보했다.
우리 가족은 한국, 미국, 필리핀 세 나라에 흩어져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전투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가장 저렴한 아이스크림 콘 하나에도 활짝 웃는 딸들의 얼굴을 보면, 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든다.
덥다고 투덜대면서도 쇼핑몰을 누비는 이 시간들이, 훗날 돌아보면 꽤 괜찮은 추억이 될 거라 믿는다.
인생은 언제나 도전하는 자의 편이니까. 오늘도 우리 부녀 삼인조는 땀을 닦고 다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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