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꽃으로 시작된 전기 오토바이 구입기
필리핀 일로일로에 온 지 두 달이 채 안 됐는데 벌써 사건사고가 한 트럭이다. 아직 ACR 카드도 없고, 차를 살 여유는 더더욱 안 되는 상황이라 이동 수단이 절실했다. 택시를 매번 부르자니 돈이 아깝고, 걸어 다니자니 이 열대의 햇볕 아래서는 체력이 버티질 못한다. 그래서 급한 대로 전기 오토바이를 하나 질렀다. 중국산, 38,000페소(약 90만 원). 가격만 보면 괜찮았는데, 구입 과정부터 심장이 쫄깃했다. 직원이 매장에서 배터리를 연결하는데 갑자기 불이 확 붙은 것이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매장 안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직원들이 허둥지둥 소화기를 가져오는 동안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이걸 타라고?" 싶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절대 이 배터리로는 못 탄다고 단호하게 버텼다. 한국에서 수십 년간 갈고닦은 우기기 스킬을 필리핀 매장에서 발휘한 것이다. 결국 새 배터리로 교체받고 나서야 매장을 나올 수 있었다. 불꽃과 함께 시작된 나의 전기 오토바이 라이프,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 사이드미러 커버는 장식이었나
새 오토바이를 받아 타고 빌리지로 돌아왔을 때, 나름 모양은 꽤 그럴듯했다. 딸들도 "아빠 이거 멋있다"며 한마디씩 거들었고, 나도 은근히 뿌듯했다. 그런데 그 뿌듯함은 정확히 며칠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 사이드미러 커버가 양쪽 다 날아가 버린 것이다. 바람에 날아간 건지, 도로 진동에 빠진 건지, 아니면 애초에 접착이 안 돼 있었던 건지 원인불명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산의 위엄이란 말인가. 그래도 거울 자체는 살아 있으니 후방 확인에는 문제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힘도 많이 딸려서 오르막길에서는 자전거한테도 추월당할 기세다. 한 단계 높은 모델로 바꾸고 싶다고 매장에 얘기했더니, 1달 후에 새 모델이 들어오면 6,000페소(약 14만 원)만 추가하고 교환해 준다고 한다. 솔직히 반신반의한다. 한국이었으면 상상도 못 할 교환 조건인데, 필리핀에서는 이런 느슨하고 인간적인 거래가 가능하다.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안 되면 그때 가서 또 우기면 된다.
🗺️ 길치 아빠의 구글 지도 탐험기
오전 수업이 끝나면 밥을 먹고, 매일 구글 지도를 켜서 새로운 장소를 하나씩 찍어 나간다. 목적은 단 하나, 일로일로의 길을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나는 원래 극심한 길치다. 한국에서도 내비게이션 없으면 집 앞 마트도 헤매던 사람이다. 앞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차를 사야 할 텐데, 그때 길을 모르면 낭패니까 지금부터 준비하는 셈이다. 전기 오토바이 덕분에 일로일로 시내 구석구석을 실컷 돌아다녔다. SM시티몰도 가보고, 현지인들로 북적이는 로컬 시장도 기웃거리고, 일로일로 강변 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려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구글 지도가 가리키는 대로 갔는데, 필리핀 도로는 일방통행이 많아서 지도와 현실이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빌리지 안에서는 아이들 둘을 태우고 셋이 유용하게 타고 다니지만, 큰 도로에 나가면 조심해야 한다. 세 명이 타면 재수 없을 때 교통경찰한테 걸린다고 현지인들이 알려줬다. 그래서 시내 탐험은 주로 혼자 나선다. 매일 다른 루트를 타다 보니 이제 주요 도로 이름 정도는 외울 수 있게 됐다.
☀️ 햇빛과의 전쟁, 그리고 오토바이 생존법
요즘 일로일로의 햇빛은 그야말로 살인적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30분만 다녀와도 팔과 다리가 새까맣게 그을린다. 처음에는 한국 습관대로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신나게 돌아다녔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며칠 만에 팔뚝과 종아리가 벌겋게 익어서 샤워할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그 이후로 한낮에도 긴팔, 긴바지는 필수 장비가 됐다. 50대 중반 아빠가 40도 가까운 열대 더위 속에서 긴팔을 꽁꽁 껴입고 전기 오토바이를 모는 모습이라니, 상상만 해도 우습다. 딸들은 나를 보며 깔깔 웃지만, 이것도 엄연한 생존 전략이다. 선크림을 바르고 나가도 땀에 다 씻겨 나가니 물리적 차단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에어컨 빵빵한 차를 타는 그날이 올 때까지, 이 중국산 전기 오토바이와 함께 일로일로를 누비련다. 사이드미러 커버가 없어도, 오르막에서 힘이 딸려도, 구입 첫날 불이 붙었어도 괜찮다. 지금 이 고생스럽고 웃기고 허술한 순간들이 전부, 나중에 딸들과 웃으며 꺼내볼 소중한 추억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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