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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일로일로 생존기

🏔️ 일로일로 부카리 산, 사춘기 딸과 말 한마디 없이 오른 날

by 피터빅 2026. 9. 5.

방학을 앞두고 둘째의 사춘기 심통에 애를 먹은 아빠가, 딸과 단둘이 일로일로 부카리 산에 다녀온 이야기. 정상에서 만난 시원한 바람과 300페소짜리 로컬 식당, 그리고 다시 트인 부녀의 마음까지 담았다.

부카리산 정상

어제는 참 묘한 하루였다.

1쿼터가 끝나고 학교는 보충수업만 남았다.
다음 주부터는 드디어 방학이다.
그래서 어제는 둘째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이 녀석이 사춘기 심통을 제대로 부렸다.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다.
엄마가 한국에 있으니, 이런 날 나는 아빠이면서 엄마 노릇까지 해야 한다.
그 자리가 참 만만치 않다.

한참을 서성이다 마음을 정했다.
"그래, 오늘은 그냥 어디든 같이 가자."
그렇게 우리는 차 한 대에 몸을 싣고 부카리 산으로 향했다.

방학 앞두고 터진 둘째의 사춘기 심통

아이가 크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그 성장 속에 사춘기라는 손님이 함께 온다는 걸, 막상 겪으니 새삼 실감한다.

둘째는 원래 애교도 많고 살가운 아이였다.
그런 녀석이 요즘은 방문을 닫고, 짧게 대답하고, 이유 없이 뾰로통해진다.
어제가 딱 그런 날이었다.

야단을 치자니 아이 마음이 더 닫힐 것 같고, 모른 척하자니 하루가 통째로 가라앉을 것 같았다.
엄마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싶어 자꾸 생각이 났다.
말 한마디로 스르륵 풀어주던 그 자리가, 아빠에게는 늘 어렵다.

그래서 나는 잔소리 대신 다른 걸 택했다.
집 안에서 계속 부딪히느니, 아예 데리고 나가 바람을 쐬자는 마음이었다.
아이를 바꾸려 하지 말고, 일단 같은 방향을 바라보자는 생각이었다.

가만 보니 막내가 마음에 걸렸다.
막내는 그날 학교에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언니만 산에 데려가는 게 미안해서, 이 산행은 막내에게 조용히 비밀로 했다.
나중에 알면 서운해할 텐데, 그건 그때 맛있는 걸로 달래주기로 하고 일단 출발했다.

말 한마디 없이 달린 1시간 30분, 부카리 산으로

부카리 산은 우리 집에서 차로 1시간 30분 남짓 걸린다.

솔직히 말하면 가는 내내 우리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운전대를 잡고, 아이는 창밖만 봤다.
라디오 소리만 차 안을 채웠다.

그 침묵이 어색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괜찮기도 했다.
억지로 말을 붙이면 오히려 더 딱딱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굳이 입을 떼지 않고, 그냥 옆에 있어 주기로 했다.

알아보니 부카리는 일로일로 레온(Leon)에 자리한 고산 지대다.
날이 서늘하고 소나무 숲이 있어서 현지에서는 '일로일로의 작은 바기오(Little Baguio)'라고 불린다.
일로일로 시내에서 대략 55~60km 정도 떨어져 있고, 해발도 제법 높은 편이라 도시의 더위를 피하기 좋은 곳이다.

시내를 벗어나 길이 구불구불해질수록 창밖 풍경이 달라졌다.
빽빽하던 건물이 사라지고, 초록 능선과 밭이 이어졌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조금씩 표정이 풀리고 있었다.

정상에서 만난 바람, 그리고 다시 트인 마음

부카리 산은 차로 거의 정상 가까이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차를 세우고 나서는 15분 정도만 걸으면 됐다.
등산이라기보다는 딱 산책하기 좋은 길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코스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었다.
사춘기 아이에게 "힘든 산을 오르자"였으면 아마 시작도 전에 등을 돌렸을 거다.
가볍게 걷다 보니 어느새 정상이었다.

정상에 서니 시야가 확 트였다.
멀리 기마라스(Guimaras) 섬까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바람.
그 바람이 어찌나 시원하던지, 땀이 순식간에 식었다.

신기하게도, 그 바람 앞에서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별것 아닌 이야기였다.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 요즘 마음에 걸리던 소소한 것들.
나는 그저 "그랬구나" 하고 들어줬다.

집 안에서였다면 아마 서로 목소리부터 높였을 이야기다.
그런데 탁 트인 산 위에서는 그게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공간이 바뀌니 마음도 바뀌는 모양이다.

로컬 식당에서 둘이 300페소, 가벼워진 발걸음

산에서 내려오니 배가 고팠다.

근처 로컬 식당에 들어가 둘이 실컷 먹었다.
현지인들이 가는 소박한 밥집이었는데, 맛도 좋고 무엇보다 마음이 편했다.

놀란 건 계산할 때였다.
둘이서 배부르게 먹었는데 300페소(약 6,500원)가 나왔다.
한국이었으면 커피 두 잔 값도 안 되는 돈이다.
이런 순간마다 필리핀 물가가 참 고맙게 느껴진다.

항목금액
둘이 먹은 로컬 식당 한 끼 300페소 (약 6,500원)

※ 환율은 2026년 9월 기준 1페소당 약 21.7원으로 계산했다. 시점에 따라 다소 달라질 수 있다.

밥을 먹고 다시 차에 올랐다.
올 때와 돌아갈 때, 같은 두 사람인데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갈 때는 침묵이었고, 올 때는 이런저런 수다가 이어졌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아니 돌아오는 차 안 공기가 정말 가벼웠다.
비싼 걸 사준 것도, 대단한 데를 간 것도 아니다.
그저 하루를 통째로 아이에게 내어줬을 뿐인데 그걸로 충분했다.

 

📌 혹시 부카리 산행을 계획한다면
서늘한 곳이라 얇은 겉옷 하나는 챙기는 게 좋다.
정상 부근까지 차로 접근할 수 있어서 아이나 어르신과 함께 가기에도 부담이 적다.
다만 일부 구간은 길이 험할 수 있으니 운전은 여유 있게 하는 걸 추천한다.

마무리 — 아빠라는 자리, 그리고 오늘 배운 것

유학을 오기 전에는 아이 교육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서 아이 둘을 데리고 살아보니, 성적보다 더 중요한 건 결국 마음이라는 걸 매일 배운다.
사춘기 심통 한 번에 온 집안이 흔들리기도 하고, 산바람 한 번에 그게 스르르 풀리기도 한다.

엄마의 자리를 대신하는 건 여전히 서툴다.
그래도 어제처럼 하루를 온전히 곁에 있어 주는 것,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카리 산은 우리 부녀에게 그런 하루를 선물해 준 곳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막내에게는 조만간 따로 근사한 하루를 만들어줘야겠다.

노력하지 말고 즐기자!
슈퍼울트라캡숑절대초긍정!


자주 묻는 질문 (FAQ)

Q. 부카리 산은 일로일로 시내에서 얼마나 걸리나요?
차로 대략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길 상태와 출발지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을 수 있다.

Q. 등산이 많이 힘든가요? 아이랑 가도 되나요?
차로 정상 가까이까지 올라갈 수 있어서, 실제 걷는 구간은 15분 남짓이었다.
등산보다는 산책에 가까워서 아이와 함께 가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Q. 부카리에서 정말 기마라스 섬이 보이나요?
날씨가 맑았던 그날은 정상에서 멀리 기마라스 섬까지 눈에 들어왔다.
탁 트인 전망과 시원한 바람이 이 산의 가장 큰 매력이다.

Q. 현지 식당 물가는 어느 정도인가요?
우리는 둘이 배부르게 먹고 300페소(약 6,500원)를 냈다.
로컬 식당은 이렇게 부담 없는 가격이라 여행이나 유학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

Q. 준비물이 따로 있나요?
서늘한 지역이라 얇은 겉옷 하나 정도는 챙기는 걸 추천한다.
햇볕이 강한 날엔 모자와 물도 챙기면 좋다.